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몬 막사이사이 (문단 편집) == 평가 == 그의 노력으로 당시 필리핀은 그럭저럭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필리핀에서는 [[국부]]로 추앙받으며, 집권기에 복지, 토지 개혁과 같은 좌파적 정책과 반공이라는 우파적 정책을 고르게 펼치려 했다. 당시의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 좌파, [[반공]]하면 우파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했고[* 이건 현대에도 어느 정도 통하는 얘기다. 특히 [[한국]]은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비 [[공산주의]] 계열 좌파나 [[민주화운동]] 지지자마저 공산주의로 몰아서 마구잡이로 탄압한 바 있고, 그 영향으로 지금도 종종 우익 정치인이나 논객, 사회운동가들이 좌파 인사들의 사상을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며 곡해하거나, 좌파 진영을 [[공산당]]을 가리키는 멸칭인 [[빨갱이]]로 비하해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로 분류됐을 사람들의 상당수가 우익으로 분류되곤 했다[* 애초에 [[사회민주주의]] 자체가 [[좌파]] 진영 내의 [[반공주의]] 성향 인사들이 [[공산주의]]에 대적하기위해 구상한 사상이다. [[공산당]]에 대한 유화책을 쓰긴 할 지언정, 그 존재 자체는 결사반대하는 좌파 인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막사이사이 이외에는 [[미국]]의 [[존 F. 케네디]]나 [[휴이 롱]],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의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좌우합작운동]]의 주역인 [[안재홍]]이나 [[조소앙]], [[김규식]] 등이다. 이들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우익]]과는 거리가 멀지만, [[반공주의|공산주의를 배격했다는]] 점 하나만으로 당대에는 우익 소리를 들었다. 막사이사이도 바로 이런 케이스로, 토지 개혁이나 복지정책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를 단순 우파라 보기는 어렵다. 물론 현실적 어려움도 있었는데, 높은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으로 구성된 상, 하원은 그의 정책(특히 토지 개혁)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조봉암]]의 급진적 농지개혁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오히려 21세기 기준으로 봤을 때 진보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개혁적인 경제 아젠다가 유행이였을 시점이기도 하다. 다만 이건 [[한국]]은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로 인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기에 그런 식의 급진적인 개혁이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데 반해, [[필리핀]]은 그런 동기가 없어서[* 막사이사이의 생존기를 기준으로, 필리핀에서 가까운 [[공산주의]]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었다. 필리핀 내부에서 자생하던 공산주의 세력이 있긴 했으나 군소 규모의 게릴라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막사이사이 본인의 회유책을 통해 대부분 와해되어 제도권 정치계에 합류해서 소멸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강력한 토지 개혁을 하려고해도 [[지주]]들과 같은 기득권층을 견제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대한민국]]은 [[북한]]의 존재로 인해 공산화의 위협이 현실에 다가왔다는 명분으로 지주들의 저항을 찍어누를 수 있었다. 양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펴기 어려웠던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비슷한 이유로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코앞에 두고 있던 동시기의 [[서유럽]]과 [[북유럽]]의 선진국들은 [[사회민주주의]] 같은 [[좌파]] 사상이 헤게모니를 완전히 차지했는데 반해, 그런 나라들과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던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사회 개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독재자]]들이 창궐하고 말았다.] 일단 그는 국민당 소속이고 국민당은 당시에도 [[중도]] ~ [[중도우파]] 포지션이였다. 하지만 이것도 좀 애매한 것이 막사이사이는 [[좌파]] 성향인 자유당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용되어 일하기도 했고, 그랬던 그가 자유당이 아닌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유가 순전히 자유당도 기득권층과 단단히 유착 관계를 맺고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던 터라서 이런 곳에서는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는 본인 스타일의 정치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국민당은 중도 ~ 중도우파 정당이었다.[* 기성 [[진보주의]] 정당의 어두운 이면에 환멸을 느끼고 [[중도주의]]나 온건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이적하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필리핀]] 문서의 정치 부문을 보면 알겠지만, 필리핀의 정당들은 공식적으로 내거는 이념은 구색맞추기에 불과하고, 각 당들이 특정 정치인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한지가 오래된 상황이다. 그래서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이 선거 때마다 합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때도 철저한 좌파 성향인 현직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 빈곤층 여성들에게 [[피임약]]을 무료로 보급하고, 마약 밀매 근절, [[공산주의]] 계열 반군에 대한 회유책 및 [[성소수자]] 인권 개선 등의 업적을 남긴 진짜배기 좌파다. 애초의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소속 정당인 [[필리핀 민주당]]부터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가 우익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하고, 그의 딸 [[사라 두테르테]]가 봉봉의 러닝메이트로 활약하는 상황인 걸보면, 좌파 성향 인사가 우파 정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이 되어서 활동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재명]]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된 뒤에 그대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셈이라서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길 수 있겠으나, [[필리핀]]은 이런 일이 골백번도 넘게 일어나도 이상할 것도 없는 나라다. 당장 막사이사이와 같은 당 출신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정반대로 철저한 [[보수주의]] [[우파|우익]]으로 필리핀의 기득권층을 타파하기는 커녕, 본인의 권력 기반으로 삼아서 그들과 유착 관계를 맺었다.]. 청백리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무척 검소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구두]]가 닳는 것을 아까워 하여 종이로 신발 깔창을 만들어 신고 다녔을 정도이다. 권력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말라카냥궁|대통령궁]]을 시민에 개방하기도 했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척이라도 이런 사람들의 비리도 일절 봐주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다.[* 키리노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막사이사이의 삼촌이 국영 시멘트 회사의 사장직에 임명된 일이 있었는데,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서 사장으로 내정된 과정이 수상쩍다는 이유를 들어서 삼촌을 [[해고]]하였다.] 대통령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공직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로 이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점은 부패로 얼룩졌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굉장히 대비되는 면모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강직하고 청렴한 모습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유래했던 만큼, 막사이사이 가문 자체가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고 산 집안이기도 하다. 이 점도 오늘날까지 권력과 부를 탐하다가 [[이멜다 마르코스]]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에 의해 [[코렁탕|코로 깔라만시 주스]]를 먹을 정도로, 여전히 부패에 찌들어 있는 마르코스 가문과는 대비되는 면모다. 그야말로 마르코스의 [[안티테제]]. 또한 부인이 영부인이 된 뒤에 [[필리핀]] 내의 지주, 대기업 총수 및 유력 정치인의 부인들과의 커넥션을 만들려고 그들을 대통령 관저에 초청했는데, 막사이사이가 이에 노발대발하며 이들을 모조리 내쫓은 일도 있었다.[* 위의 각주에서 언급된 비행기 사고에 대한 음모론이 [[개소리]] 취급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가족들의 부정부패를 지극히 경멸하던 사람 본인이 직접 뇌물을 돌리러 다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되려 뇌물이 안 통하는 강직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지주들과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의 훼방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개혁이 지지부진해지기도 했다.] 정치인의 청렴함은 국가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하물며 필리핀 같은 [[개발도상국]]이면 더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막사이사이는 서거 당시 정치인으로서는 새파랗게 젊은 50세에 불과했던데다 [[재선#s-1|재선]]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필리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몰락의 시작은 바로 이 막사이사이의 사망과 뒤이은 대통령들의 연이은 재선 실패, 그리고 결국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마르코스]]라는 희대의 독재자의 등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막사이사이와 같은 청렴한 인물이 정상적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고 그 뒤에도 '국가의 큰 어른'인 전직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다면 설령 경제적으로 큰 발전은 하지 못하더라도 국가 청렴도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 기여가 있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